
작년 가을, 창원-서울-의성-밀양 내가 지역을 거쳐온 경험을 이야기로 엮어 <복닥맨션>이라는 책에 실었다. 책은 나도 모르는 발을 달고서 예상하지 못한 곳까지 닿았고, 서울에 사는 E는 책을 읽고 편지와 선물을 보냈다. “나는 이미 잘하는 것을 더 잘하는 것보다, 본인에게 어렵고 불안함을 주는 걸 도전할 수 있는 마음. 그게 용기가 아닐까 싶어. 그런 면에서 넌 나에게 용기 있는 사람이야. 어디에 살든, 용기의 양이 때론 줄든 늘든 너를 이루는 그 마음이 결코 사라지진 않을 거라 믿어.” 용감하게 사는 게 어렵다는 나의 한탄 섞인 문장들에 대한 단단한 답장이었다. 편지의 말미에 친구는 작년 밀양에 왔을 때 이팝나무 꽃이 핀 위양지를 못 본 것이 아쉽다며, 올해는 이팝나무가 필 때 밀양에 와보고 싶다 했다.
E는 약속한 대로, 이팝나무 꽃이 피는 5월에 밀양에 왔다. 혹시나 약속한 날보다 꽃이 빨리 질까 비 소식을 살피며 마음을 졸였다. 다행히 날씨는 맑았고, E와 나는 동네 김밥집에서 톳 김밥을 도시락에 담아, 이팝나무 꽃이 가득 핀 위양지로 소풍을 갔다. 위양지 호숫가 그늘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E가 직접 수확하고 만들어, 서울에서부터 고이 담아온 녹차잎을 천천히 우려 나눠마셨다. 우리의 돗자리 옆으로 활기찬 강아지에게 끌려다니듯 왁자지껄 산책하는 어린아이들, 사진을 찍는 부부, 친구들이 지나갔다. 아무리 계절이 좋아도 시간을 내어 여유로운 피크닉을 누리는 일이 쉽지는 않은데, E 덕분에 좋은 계절의 좋은 순간을 때에 맞게 보냈다. 그날 산책 삼아 걷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이팝나무 꽃을 발견해 주워다가, 잡지 사이에 눌러 말렸다. 그때 만난 이팝나무 꽃을 시작으로, 어쩌다 8월이 된 지금까지도 나는 계절마다 지는 꽃을 주워 말린다.
지난 3년여간 내가 거친 지역만 세 곳, 낯선 지역과 일에 적응하기를 반복했다. 같은 계절도 장소가 바뀌면 낯설게 느껴지고, 일상은 속절없이 바쁘게 흘러갔다. 그 가운데 오랜 친구들이 지역의 경계를 넘어, 어떤 계절에 잠시 등장했다. 계절마다 피고 지는 꽃처럼. 조금 서글프기도 하지만, 친구들과 잠시라도 내가 머무는 곳의 아름다운 계절을 나누며, 나는 한 계절을 그리고 내가 있는 지역을 더 깊이 누리게 되고는 한다.
E가 편지와 함께 선물해 준 책 <제철 행복>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E의 편지에도 옮겨 적혀있던 문장이기도 하다. “우리는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었지만 평생 미나리전 앞에서 친구를 떠올릴 것을 생각하면, 오래 전의 약속이 모양만 바뀐 채로 계속 지켜지고 있는 것 같다. 그때 봄 산을 같이 걷길 잘했지. 평상에 앉아 미나리전을 먹길 잘했지. 어쩌면 좋은 계절의 좋은 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은 마음을 줄여서 우정이라 부르는 건지도 우리는 그렇게 잊지 못할 시절을 함께 보낸다.” 내가 낯선 지역에 적응하며 단단한 삶을 가꾸게 하는 건 결국 우정에 빚진다. 나는 어느 곳에서나, 좋은 계절과 좋은 순간을 살핀다. 모든 것이 좋지는 않아도, 대체할 수 없는 분명한 아름다움들을 발견한다. 그것들을 귀하게 모아, 내가 있는 이곳으로 친구들을, 누군가를 기쁘게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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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그늘이 비치는 위양지 호숫가
부록 | 압화기록 Ep.1 이팝나무 꽃
